Happy birthday to me, 2013

2013-08-28

A drawing on my birthday

언제부턴가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챙겨서 뭘 하진 않게 되었다. 어차피 날짜라는 건 연속적인 시간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부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회사 창업 후 달라진 모습을 기록해보고 싶다.


사실 거의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일을 시작하는데 우아한 동기나 굳은 마음가짐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변하지 않는 주변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발전 없는 내 모습이, 그리고 크게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어쨌든 도망친 거다.

새로운 회사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 자신이 기존에 있었던 곳에서의 도망자, 패배자 그리고 낙오자라고 생각되었다. 컴퓨터 게임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했기에 다른 분야로 도망간 것뿐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해에는 헛바람이 많이 들어갔다. 모바일 시장이 열린다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꼭 나를 위한 것 같고, 나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무명이었으며, 우리 회사도 여전히 무명이었고 다른 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음만 급했지, 실제도 제대로 하는 일은 없었고, 주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 했다.

여전히 시장을 읽을 줄 몰랐고, 이상향만 꿈꾸며 현실적인 작업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미루기 일쑤였다. 왜 예전만큼 능률이 오르지 않을까, 재미있을 줄 알고 시작했는데 왜 재미가 없을까... 변명은 늘어갔고 벌여놓은 일들은 수습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애초에 인정하고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 뛰어난 개발자가 아니고 그냥 딱풀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얘기하곤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능한 프로그래머여야 하고, 유능한 시스템 엔지니어와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일 뿐 아니라, 인터페이스 전문가이기를 꿈꿨다. 그 와중에 회사가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고, 얼른 돈을 크게 벌어 영화에서 나오듯 돈 걱정 없이 좋은 집에, 포르쉐를 타고 출퇴근하는 쿨한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으니,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구현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그렇게 구현한 서비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서 원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환영받지 못할 수 있는데, 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현실 감각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매일 꿈만 꾸고 있을 때, 실제로 일을 해내고 서비스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있어 아직 회사가 버티고 있을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성과도 내고 있다. 그 성과 덕분에 투자도 성공적으로 유치하여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3년간 그들과 함께한 덕분에 작은 성공을 맛보기도 했지만, 더 소중한 것은 그들 덕분에, 그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점이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회사를 옮긴 이후에 PC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게임 시장에서 교육 및 멀티미디어 시장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전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기술 수준과 완성도를 요구하는 일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이 썩어 문드러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겨우 익혀왔던 그 얇은 지식 위에 쌓이는 지식과 경험이 너무 많았다.

허황된 생각과 헛바람에 빠져 몇 년간을 지내왔지만, 나도 모르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 Twitter와 IRC에서 만난 수 없이 많은 유능한 엔지니어들.
  •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얻는 키워드들과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 파이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만난 사람들과 한국 파이썬 커뮤니티.
  • Seoul.pm 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알게 된 펄 커뮤니티와 그 세계.
  • 번역 사이트 Looah를 통해 공동으로 번역을 하고 공유하는 멋진 경험.
  • 설명이 필요 없는 Github.
  • Google과 StackOverflow에서 얻는 경험과 노하우.
  • Soundcloud를 통한 음악 공유의 세상.
  • Dribbble을 통해 맛볼 수 있는 트렌디한 웹/앱 디자인들.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나서,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어 행복하다. 아직 스포츠카도 없고,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